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.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,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.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국가 멸망/사례 (문단 편집) ==== [[서진]]★◆ ==== || [[파일:external/www.pahoo.org/img0265-01.jpg]] || || 서진의 초대 황제 [[사마염]] || || [[파일:external/upload.wikimedia.org/Western_Jeun_Dynasty_280_CE.png|width=430]] || || 서진의 영토와 영향권 || |||| '''원인''' || || 전쟁 ||'''패전해 정복을 겪음 ([[영가의 난]])[br]내전 ([[팔왕의 난|팔왕의 정변]])'''|| || 내란 ||봉기[br]'''[[팔왕의 난|팔왕의 정변]]'''|| || 내정 ||극단주의 세력의 만연[br]'''__막장인 지도자 ([[사마염]], [[사마충]])__'''[br]'''__지상 최악의 실세 ([[가남풍]])__'''[br]실패로 돌아간 개혁[br]__지도층에서 만연한 부패__[br]'''다양한 민족과 종교의 관리 실패 ([[영가의 난]])[br]통합적인 지방 관리의 실패 ([[팔왕의 난]])'''|| || 공황 ||'''살인적인 초인플레이션'''[br]비정상적인 세율[br]'''국가 경제의 파탄'''[br]바닥을 드러낸 국고[br]사상의 물질적, 정치적 타락([[청담사상]])|| || 재해 ||'''섬서성 일대의 염화'''|| |||| '''결과''' || || 멸망 ||소요(쿠테타), 국치(유린) || 초대 황제인 [[사마염]]부터가 [[개념은 안드로메다로|1만 궁녀와 함께 막장스러운 통치를 시작했으며]],[* 그 개막장 [[손호]]도 5,000명이었다. 웃긴 건 사마염은 오나라를 먹어치운 후 손호의 5천 궁녀도 덤으로 먹어치웠다는 거다. 그러니까 반은 원래 있던 이들이고, 반은 흡수한 이들.] 귀족들도 역시 심한 사치를 부렸다. 그런데 그 많은 돈이 다 어디서 나왔을까? 당연히 백성들을 쥐어짜서 나온 것이었다. 어마어마한 부자였던 [[석숭]]은 형주자사로 있으면서 지나다니는 상인들을 협박하여 돈을 뜯어냈다고 한다.[* 이건 양반인 게 [[양수(서진)|양수]]라는 사람은 '''아예 국가 관청에 강제로 사채를 씌웠다.'''] 또 서진의 귀족층 사이에는 변질된 [[청담사상]][* [[위(삼국시대)|조위]] 시절 [[죽림칠현]]으로 대표되는 허무주의, 신비주의적인 담론이었으나, 과시욕과 결합되면서 오히려 청담을 위해 사치를 일삼는 모순이 생겼다.]이 유행해서 국사는 돌보지 않고 궤변만 늘어놓기를 즐겼다. [[구품관인법]]과 지나친 사치 등의 문제가 거듭 나왔으나 오로지 지적에만 그치고 개혁 따위는 시도조차 없었다. 하다 못해 귀족들을 숙청하고 황권을 강화하는 정책조차 처음부터 정통성이 취약한 사마씨 정권의 특성상 할 수도 없었고 그럴 의지조차 없었다. 게다가 사마염은 이제 [[삼국시대(중국)|난세]]는 끝났다며 군대를 해산시키고, 대신 친족들을 각지의 왕으로 책봉하여 치안을 맡겼다. 달리 말하자면 황위 계승권을 지닌 사람들이 각자 군대를 거느리고 자신의 지역을 기반으로 세력을 확장했으니 [[군웅할거]]의 재림인 셈이었다. 때마침 적절하게 소빙기가 오면서 가뭄과 홍수가 번갈아 찾아오고 기근이 벌어지며 민생이 파탄났고 농민들은 굶어죽기 싫으면 귀족들에게 투탁해서 반노예 상태의 객(客)으로 떨어져야 했다.[* 귀족들에게 농민이 의식주를 의존하는 것으로, 맘만 먹으면 농민이 귀족 곁을 떠날 수는 있으나, 그 곁을 떠나기 위해서는 그동안의 의식주 비용을 몽땅 귀족들에게 지불해야 했다.] 거기에 사마염의 [[사마충|뒤를 이은 아들]]은 후대 사학자들이 대놓고 [[지적장애]]로 추정할 정도로 정치를 할 능력 자체가 없었는데, 그런 황제를 대신해야 할 황후 [[가남풍]]은 '''아예 중국 역사 전체에서 최악의 악녀'''라 불릴 정도로 도가 지나친 전횡을 부렸다.[* 다른 것은 몰라도 말엽에 사마휼을 죽인게 최대의 실수였다. 가남풍이 패악질을 많이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적절한 명분이 되지 않아 움직이지 않던 황족들이 이 사건 하나에 우르르 들고 일어났다.] 여기에 대귀족들의 횡포로 중앙에서 밀려난 중소귀족들이 지방에 있던 황족들의 밑으로 들어가서 바람을 불어넣자, 마침내 [[팔왕의 난|야심을 가진 황족들이 일어나 자기들끼리 황제자리를 두고 싸워댔다]]. 그런데 이걸로도 모자라 국경 안팎에서는 흉노족, 선비족을 주축으로 한 오랑캐와 도적들이 준동했다. 익주에서는 저족 [[성한|이특]]이, 형주에서는 만족 장창이, 화북에서는 갈족 [[석륵]]이, 산서에서는 흉노족 [[유연(전조)|유연]]이, 산동에서는 한족 [[왕미(전조)|왕미]]가 봉기를 일으켰다. 결정적으로 중국에 침투해서 살던 흉노족이 황족들의 내란을 틈타 독립을 선언하고 석륵·왕미와 함께 [[영가의 난|마음껏 화북을 휩쓸어갔다]]. 이미 널리 초토화한 진나라에서는 [[사마월]]이 마지막으로 발악했지만 [[사마치|황제]]의 배신 탓에 울화통이 터져서 죽었다. 이렇게 수도 낙양이 함락되고 장안에 망명정부가 들어섰지만, 주위의 군벌들에게 이리저리 치이고 타고 다닐 마차도 없을 정도로 형편 없어서 3년 만에 망했다. 정통성은 강남의 2차 망명정부로 이어졌지만, 여기부터는 [[동진]]이라는 이름으로 따로 나눈다. [[오호십육국시대|그리고 화북은 멸망했다.]] 보다시피 총체적인 난국으로 '''왕조국가에서 이렇게 하면 망한다라는 너무나도 모범적인 사례이자 훌륭한 [[반면교사]]이다.''' [[역사는 반복된다|참고로 동진과 기타 남조의 왕국들도 비슷하게 돌아가며 망했다.]] 그나마 지도층들은 서진보다 약간 멀쩡했지만 암군라인은 똑같았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